속력을 내라 속도가 느리다

경험 많은 선교사들은 사역을 천천히 시작할 것을 당부한다. 준비도 훈련도 없이 뛰어들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 농도 짙게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후에야 출발케 하셨다. 성령 충만 없이는 사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적진에 투입된 병사는 하나님의 싸움을 맹렬히 개시해야 한다. 예수님은 어떠하셨나? ‘식사할 겨를도 없이뛰셨다. ‘행로에 곤하여수가성 우물가에 앉으신 순간에도 사마리아의 한 여자를 구원하셨다. 아침 일찍 한적한 곳에 가셔서 새벽기도를 하셨고 밤이면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셔서밤새워 기도하셨다. 풍랑에 기우뚱거리는 조각배에서도 피곤하신 예수님은 깊은 잠을 청하셨고, 무화과 나뭇잎을 헤쳐보시며 시장기를 메우려 하셨다. 공중의 새도, 여우도 기댈 토굴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조차 없으셨다. 글자 그대로 분골쇄신(粉骨碎身) 하셨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어찌하여 이렇게도 태만한가? 한가한 시골집 같다. 이슬람의 세력은 쭉쭉 뻗어 가는데 기독교는 느림보 행진이다. 단독 종교로는 이슬람이 단연 선두다. 그 다음이 가톨릭, 힌두교, 기독교 순이다. 최근 10년 사이에 부족종교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시크교도가 13.5%, 유대교 6.1%, 이슬람교가 2.2%의 속도로 성장한 반면 기독교도는 오히려 1.4% 감소한 통계다.

통탄할 일이다. 물속에 빠진 생명을 구출하라고 띄워놓은 구조선은 어디 갔는가? 유람선으로 개조를 하여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가? 도대체 오늘의 크리스천과 교회는 창조적인 고민이 없고 생산적인 불안감도 없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은 동족의 구원을 위해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을 안고 몸부림을 쳤는데(9:1)! 귀머거리인가, 장님인가, 벙어리인가? 안 된다. 이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 15명을 구원했다고 자랑하는 일본 청년을 향해 무디는 일본에 5천만 명(당시 인구)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하고, 더욱 분발할 것을 각성시켰다.

부드 대장의 설교를 듣고 감동 받은 주조장 주인은 급히 집에 전보를 보냈다. “간판을 떼라! 구원받았다.” 술 공장을 즉시 폐쇄시킨 것이다. 피니의 설교를 듣고 찔림을 받은 선술집 주인은 죄를 토해내고 술집을 즉시 기도처로 만들었다. 신속한 결단이다. 사자 입에 물려있는 양 새끼를 구출하려고 다윗은 겁 없이 쫓아가서 사자의 입을 찢고 그 양 새끼를 구출했다. 지금 마귀는 엄청난 생명을 입에 물고 지옥으로 재빨리 달리고 있다. 지체 말고 쫓아가서 생명을 탈환해야 한다. 지옥 구덩이에 집어넣기 전에 전속력을 내어 구출해야 한다. 마귀보다 더 빠른 속력으로 뛰어야 한다.

자신에게 매질하라. 나태하면 삯군 목자다. 최후 5분간 전투에 이기면 전체를 이기는 셈이다. 예수님의 피를 널리 뿌려라. 속력을 내라! 현재의 속도로는 패한다. 여호와 닛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