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 말고 진리 편에 서라

갈멜산 중턱에서 어느 날 희한한 전투가 벌어졌다. 450명과 맨발의 한 시골 청년과의 능력대결이다. 한쪽은 왕비의 지원을 받는 위세 등등한 바알신 제사장들이고 야인 엘리야는 디셉의 시골 선지자다. 엘리야의 야무진 절규가 내린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서서 머뭇머뭇하느냐 하나님이냐 바알이냐를 택하라”(왕상18:2).

더펄머리에다가 가죽 띠를 두른 자의 당돌한 외침은 광야에서 다져진 영성의 위엄이다. 드디어 참 신을 가리는 시합에서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자 사악한 바알의 선지자 450명은 기손강에 수장당하는 혁명으로 이어졌다. 약속의 땅을 분배 받은 지가 오래인데 철병거가 무서워서 주저만 하는 일곱 족속에게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18:3). 긴급한 출동을 명했다.

임종을 앞둔 여호수아는 변덕스러운 그 백성의 갸우뚱거림에 일침을 놓는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 더듬거리는 롯의 처와 딸들에게는 팔목까지 끌고 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지체하면 죽기 때문이다(19:16). 세상은 사탄의 종자들과 하나님의 군사가 휴전 없는 길고 긴 영적 전쟁을 치르는 현장이다.

예수님께서는 넓은 길 사망의 길과 좁은 길 영생의 길(7:13), 두 갈래 길이 있음을 가르치시며 필수적인 선택을 호소하셨다. 결국 창고에 쌓이는 곡식과 풀무 불에 소멸되는 가라지의 최후로 모든 것이 결판나기 때문이다. 화초인가, 잡초인가. 지금 바로 자기가 설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일단 부름 받은 하나님의 군대 가운데도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경고하셨다. 같은 곡식인데 알곡과 쭉정이가 있다. 충성하는 선한 목자가 있고 삯군에 속한 자가 있다. 고통 속에 처한 병든 자를 돌보는 양과에 속한 자가 있는가 하면 무정한 염소 떼에 소속된 자가 있다. 등에 기름을 가진 지혜로운 처녀가 있는 반면 기름을 준비 못한 어리석은 가짜가 있다(25:1-3). 비웃음이 아닌 웃음에 익숙한 자로, 아첨 아닌 칭찬에 능숙한 자로, 외면보다 내면이 알찬 자로, 조소가 아닌 미소의 입술 가진 자로 처신을 바꿔야 하리라.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은 충성된 자(25:13)와 눈에 연기 같은 게으른 자(10:26) 사이에서 선택은 제각기 몫이다. 허술남보다 완벽남이 좋은 것처럼 말이다.

길에 놓인 걸림돌을 타박하는 대신 디딤돌로 삼는 슬기로 변신하라. 위기 앞에 떨기보다는 이 시험을 비켜 가면 대로가 열릴 고비라고 생각하라. 되씹고 곱씹으며 고질적으로 괴롭히는 그 작자나 환경을 내게 부과된 천형(天刑)이라고 원망하는 대신 천혜(天惠)라고 해석하라. 답답함을 담대로 바꿔 맞서라. 분노에 치우치기보다는 그를 조종하는 사탄에 대해 의분을 가져라. 어떤 길목에 섰든지 생각을 춤추게 하라. 우리는 주님의 섭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나는 불행하다 생각하면 어둡고 초라한 가난이 될 것이고 행복하다 생각하면 밝고 영광스런 가난이 될 것이다. 불평은 인생감옥을 만들 것이고, 감사는 인생감탄을 만들 것이다. 행운과 대박에 기대는 막연한 자가 아니라 아예 행복한 자의 명단에 등록하라. 요동을 모르는 진리의 사람, 반석의 사람이 되어라.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