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

울지 마

엄마 돌아가신지

언제인데

너처럼 많이 우는 애는

처음 봤다

해마다 가을날

밤이 깊으면

갈댓잎 사이로 허옇게

보름달 뜨면

내가 대신 이렇게

울고 있잖아   

- 귀뚜라미에게 받은 짧은 편지정호승

bbe7babb_bbe7babb_b8b6bbf91.jpg안녕, 귀뚜라미야. 난 정말 몰랐어. 네가 울 때마다 시끄럽고 귀찮은 마음에 문을 쾅, 닫아 버리기도 하고 짜증을 내기도 했었지. 내 대신 울고 있었구나. 난 말이야, 너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나만 보였거든. 스스로 연민을 느끼며 펑펑 우는 동안은,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았어. 미안해.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다고 생각을 해. 그래서 나만 보인단다. 부끄럽게도 다른 이를 위해 울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어. 내 대신 울어주어서 고마워. 네 눈물 때문인지 난 지금 평안하고 감사해. 이젠 누군가를 위해 울어볼게 너처럼.

예수님의 이름

로마 황제 가운데 A.D 60년경의 네로는 얼마나 사악한지 그가 통치하던 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죽음을 당했다. 사도 바울도, 사도 베드로도 그때 다 순교했다. A.D 90년대에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황제가 신이라고 고백하게 하고, 고백하지 않으면 그 즉시 다 사형에 처했다. 짐승의 밥이 되어 죽게 하든지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든지 아니면 불에 태워 죽였다. 밤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들의 죽음은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이러한 박해는 300년 가까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말할 수 없는 환난과 핍박으로 계속 되었다. 핍박을 받는 기간 중에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황제를 신이라고 부르며 주님을 떠나갔다. 죽음과 생명의 엇갈림이 온 천지를 수놓았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울다 지치고, 핍박을 받고, 몸이 찢기고, 목이 잘리며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주는 위대한 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위로를 넘어 목숨 같은 절실함이었을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환경들은 지옥 그 자체다. 전부인 예수님의 이름을 부인해야 하는 실체들이 마음과 영혼을 위협하고 두려움이라는 단순함으로 다가와 예수님의 이름을 버리라고 유혹한다. 하지만 죽음과도 같은 그 환경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이름이 함께하는 신음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된다. 거기서 기적은 일어나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결국 승리를 선물한다.

옥에 갇히고 강의 위험과 배고픔과 추위와 비방과 욕, 지옥 같은 깊은 감옥이나 원형 경기장의 사자 밥이 되는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광야 여정들은 치열한 영적 전쟁터이다. 안락한 집이나 달콤한 음식들, 따뜻한 가족들, 이웃들, 아니면 혼자 얼마든지 놀 수 있는 인터넷이나 게임 등의 도구들이 우리 삶을 넘치도록 즐겁게 해준다. 그 즐거움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덤비는 배고픈 우는 사자와 달리 포근하고 안일하게 독처럼 우릴 쏘아 댄다. 영적인 삶을 위협받고 있지만, 치열한 환경이 아니기에 우리는 안락함에 묻어 그럴듯한 나름의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 모든 것에 타당함을 붙여준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습관처럼 부르며 하루를 또 지나 보낸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며 피 값으로 베풀어주신 구속의 은혜가, 한순간의 안락함과 함께 가벼운 목숨 값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순결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여 거룩하고 순결한 이름이 더럽혀진다. 물질의 풍요와 육신의 안락을 구하고, 명예와 갖가지 세상적인 성공을 비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만능기계용이 되어버린 예수님의 이름, 세상 사람들의 발밑에 모욕당하고 혐오스럽게 이용되기도 하는 예수님의 이름. 내가 필요할 때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나타나 주어야 하는 예수님의 이름. 내게 임하사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고 내 환경을 편하게 만들어 달라고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

나의 누군가를 위해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이 오랜 만에 조국인 영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글래스고 대학은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학위 수여식장에 나타난 그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 다 놀라서 손을 입에 대었다. 리빙스턴 박사는 굉장히 미남이었다. 키도 크고 몸도 좋았는데, 박사 학위를 받으러 나온 리빙스턴은 완전히 얼굴이 형편이 없이 늙었고 몸도 자유롭지 못했다. 왜냐하면 원시림에 다니면서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증거 하다가 사자에게 물려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겪었고, 무서운 아프리카 토속 병에 걸려서 열이 많이 나도 치료할 도리가 없어서 몇 번이나 죽다가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리빙스턴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고향에 찾아왔으나 또 다시 내가 있을 곳은 아프리카 오지입니다. 영국의 런던은 내가 있을 곳이 없습니다.”고 말하며 다시 아프리카로 간다고 말할 때 다 놀라고 수군거렸다. 그때 리빙스턴이 다시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프리카 어느 곳에 가도 세상 끝 날까지 나와 같이 계시겠다는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께서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셔서 원시림과 광야를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이 땅 어디에도 우리 몸이 늘 평안을 얻고 근심 없이 안식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죄와 불행의 서식지인 이곳에서 우리 몸의 평안을 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리빙스턴이나 믿음의 선진들은 일찍이 그것을 실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기웃거리며, 부스러기라도 구걸하려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내 몸을 던져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데 사용했다.

내가 누군가의 힘이 된다면, 누군가가 나로 인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게 된다면, 나는 그의 도구가 되는 일에 온 맘과 뜻과 정성을 다했다. 주의 이름으로 가야 할 곳이 이 세상엔 많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진리의 등불을 켜고 비춰야 하는 많은 구석구석의 어둠들이 있다. 영혼의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앉은뱅이 신앙인들이 도처에 많이 있고, 예수님의 이름이 희망이 되어야 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우리 주변에는 넘쳐 난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고 희망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리라 약속하신 주님을 알리는 일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할까.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를 향해 비난과 판단만을 보내야 하겠는가.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며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하겠느냐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함께 울어야 하지 않을까.

울지마, 내가 대신 울고 있잖아.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누군가는 듣고 있다. 절실한 누군가는 나의 눈물을 기다리고 있고, 내가 흘리는 눈물을 주님은 필요한 누군가에게 전해 주실 것이다.

내가 오늘 행하는 한마디 화살기도나 마음가짐 하나, 작은 눈빛 하나, 따뜻한 생각 하나는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누군가의 마음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내가 보내는 눈물은 누군가보다 예수님이 먼저 받으신다. 우리의 작은 희생과 작은 섬김의 이야기들은, 천국에서 먼저 빛나는 보석이 되는 일은, 참 기쁘고 설레는 일이다. 주님이 먼저 울어주신 눈물로 오늘 내가 있고, 내가 울어주는 눈물로 주님이 위로 받으시고 누군가는 힘을 얻는다.

울지마, 내가 대신 울고 있잖아. 마음에 담고 하늘을 보면 더 드높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