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섬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신문사에 무공해의 굵은 알밤을 보내왔다. 이런 일이 있으면 간사님들과 일꾼들의 지쳤던 심신이 다시 힘을 얻는다. 달콤한 밤 때문이 아니다. 잠자리에 들 때면 쑤시는 팔다리로 인해 신음이 나오지만, 아침이 되면 또 새 힘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로 다시 일터로 나가시는 장로님, 권사님 내외분의 사랑이 배달된 까닭이다. 죄송하고 감사하여 드리는 전화 너머로 따뜻한 마음이 흘러온다. “아니에요. 금세 주웠어요. 알이 굵어 참 좋아요. 그리고 또 한 번 오셔서 쉬었다 가시면 좋겠어요.”

모든 것이 섬기는 마음이다. 불평보다 언제나 감사가 많고, 불만보다 순종이 많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주님의 마음이다. 이런 분들과의 사귐은 언제나 행복하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9:50).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요, 변질을 막는 빛이요 진리라 할 수 있다. 주님의 빛과 진리를 중심으로 서로 화목하는 것, 그 속에 행복이 크고 영혼이 자라간다. 서로 서로 섬기려 하고 상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분들에게 주님의 기쁨이 있다.

하지만 강한 아집으로 자기를 주장하고, 자존심을 내세우고, 격한 감정으로 무언가 가르치려 하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슬픔이 있다. 그런 이들은 일을 아무리 잘 처리했다 해도 주님의 기쁨이 될 수도, 하늘의 상도 있을 수 없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고전13:5)라는 말씀에 걸리기 때문이다. 수고는 했지만 사랑으로 행치 않은 것들은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겸손한 이들은 가을 하늘처럼 마음이 평화롭다. 주님의 뜻을 좇으며 자꾸만 주님께 맡겨드리기에 주님의 위로가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11:29).

평화를 잃는 일은 언제나 남이 아닌, 내 속의 애집과 교오함 때문이다. 그로 인해 격정에 휩싸여 몸을 떨며, 겸손과 함께 사라진 지혜의 자리에 어리석은 욕망이 차지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잘 회개하다 어느 날 분노에 사로잡히고, 겸손히 듣는 걸 좋아하다 어느 날 주장하기에 바빠지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할 때 부어지던 진리를 잃기 시작했음에 기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던 예배 말씀이 사람의 소리로 들리고, 천사의 전병을 먹던 자가 돼지의 쥐엄열매를 먹는다. 평화를 잃은 자리에 벼르는 마음이 들어오고, 은혜가 부어지던 심령에 거짓 신념들이 생겨난다. 자신은 선한 일을 위한 정의라 생각하고,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여전히 받고 있다 믿지만, 악한 것에 바쳐지는 충성이요, 성경 말씀에서 떠난 거짓 은혜인줄 알지 못한다.

사랑과 섬김처럼 유익한 것이 있을까. 겸손한 의탁처럼 평화를 얻는 일이 있을까. 뉘우치는 죄인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격려하는 일이 주님의 일이시다. 원수 갚는 일은 주께 맡기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주릴 때 먹게 하는 일이 주님의 기쁨이시다.

따뜻한 알밤을 깨물며 단단한 자아를 뚫고 스며드는 사랑과 섬김의 행복을 맛본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