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숲으로 가자

 

최근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장이라 할 수 있는 대나무 숲이 성행하고 있다. 익명으로 글을 올리는 사이버 공간 대나무 숲에는 속 깊은 이야기를 술술 꺼내놓는 이용자들이 많다. 힐링을 바라며 누군가와 내 문제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외로운 대나무 숲

대나무 숲은 20129, 트위터에 처음 등장했다. 한 출판사 직원이 회사 부조리를 고발하려고 출판사 옆 대나무 숲이라는 계정을 개설한 것이 시작이 되었다. 인터넷에서 이슈가 됐고 곧바로 직종별 대나무 숲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열풍은 지난해 말 페이스북으로 옮겨왔다. 트위터에서는 직장인들이 주로 활동했다면 페이스북에서는 대학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페이스북의 대나무 숲은, 이용자들이 직접 고민을 올리는 게 아니라, 운영자에게 익명의 메시지를 보내면 운영자가 필터링을 하여 글을 올린다. 무분별한 내용이나 장난 섞인 글이 사라지니 진짜 고민을 털어놓는 공간으로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대에서 처음 개설된 페이스북 대나무 숲 페이지 수는 7개월여 만에 40여개로 늘어났다. 이들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이 9만 명에 육박할 정도라고 한다. 연세대나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 등 활동량이 많은 페이지는 하루에도 수십 개의 고민 글과 댓글이 올라온다.

 


대나무 숲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귀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왕의 관모를 만들던 한 기술자가 왕의 귀는 당나귀처럼 크다.’는 비밀을 평생 간직하다 죽기 전 대나무 숲에 들어가 외쳤다는 것이다.

현대판 대나무 숲은 여기에 힐링의 의미가 더해졌다. 말 못할 고충을 털어놓고 위로받는 공간이 된 것이다.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 걱정도 없고 게다가 다른 이들에게 조언까지 얻을 수 있으니 안성맞춤이다.

구인구직 사이트 알바몬이 연초에 설문조사한 결과, 대학생 951명에게 물으니 응답자 66.7퍼센트(634)가 스스로 나홀로족이라고 했다. 그들은 학교생활 대부분을 혼자 한다. 주목할 점은 이들 중 88.5퍼센트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이 울고 웃으며 공감해줄 사람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내심 외로운 것이다.

온라인상에서 모르는 사람과의 교류가 익숙해진 현대인들이 직장생활, 연애, 취업, 성적 등의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과 자신의 속내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대나무숲에는 외로움을 토로하는 글들이 많이 보인다. 주변에서 자신의 속 깊은 얘기를 나눌 대상을 찾아보았지만, 현실에서는 그만큼 믿고 신뢰할 만한 이가 없더라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말 못할 고민을 털어 놓았다가 핀잔과 잔소리만 듣게 되니, 자연 익명이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의 대나무숲으로 모여들게 된 것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

이런 현상들은 우리의 답답하고 아픈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적으로는 묻지마 방화와 살인사건이 늘고 있는 실정이고, 세월호 사건과 윤일병 구타사망 사건으로 인해 온 국민이 가슴앓이를 앓고 있다.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이 극에 달하여 스스로 욕구불만과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고 있다. 남의 탓만 하면서 온갖 상처로 얼룩진, 치유되지 못한 상처투성이들로 살고 있다. 당리당략을 극복하지 못한 정치인들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고, 공무원들은 구태의연하고, 사회 지도층들은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고 있는 서민들도 답답한데 딱히 해결책이 없어 분노와 무기력을 동반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강력한 치유(힐링)가 필요하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할 때다. 전에는 죄와 온갖 불행으로 인해 상처 입은 영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치유받고, 오히려 그로 인해 인격이 다듬어지고 마음이 넓어져, 상처받은 다른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와 신앙공동체가 이런 반전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성소, 영혼의 테라피(therapy)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공허함과 상처로 아파하는 영혼들에게 평안과 쉼을 줄 수 있는 영적인 대나무 숲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죄성과 정욕에 얽매여 수많은 상처와 고통으로 아파하다가 주님 은혜로 치유받고 성장했으니 말이다. 우리 주님은 치유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아파하는 세상을 힐링하기 원하신다. 상처받은 치유자들을 통해 상처(scar)투성이인 이 나라와 민족이 마지막 때 쓰임받는 큰 별(star)이 되기 원하신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알고 실천할 때 가능하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4:2).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사람들은 정죄의 돌을 들어 쳐죽이려 했지만 주님은 긍휼의 힐링을 베푸셨다. 멸시천대받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와 나환자 시몬에게 편견을 깨뜨리시고 관용의 힐링을 베푸셨다. 심지어 십자가에서는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저주하는 이들에게,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해 그러하나이다.”라고 용서의 힐링을 보여주셨다.

성부께서는 어두운 이 세상에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빛을 밝히 비춰주셨다. 그리하여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일지라도, 자신을 정죄하지 않고 품어주시는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의 빛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가정, 교회, 사회, 나라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 준주성범의 말씀이 생각난다.

누가 만일 네게 한두 번 훈계를 듣고도 그대로 아니하더라도 그와 쟁론치 말고 오직 하나님께 그 사정을 다 맡겨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할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잘 바꾸실 줄 아시기 때문이다. 너는 남의 과실과 연약함을 어떠한 것이든지 끈기 있게 참는 법을 배워라. 너도 남에게 괴로움을 끼쳐주는 일이 적지 아니하리라. 너도 네 자신을 마음대로 못하여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이 네 뜻대로 되기를 바랄 수 있으랴? 우리는 남들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 자신의 허물을 고치지는 않는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빛이 밝게 비쳐지고, 네 탓이 아닌 내 탓이라 여기는 진정성 있는 깊은 통회자복이 있을 때 강력한 힐링이 임할 것이다. 상처 입은 영혼들이여, 영혼의 힐링이 있는 그리스도의 숲으로 나아가자.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