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노숙자였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눅21:37).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요7:53).

갈릴리에서 전도하실 때에는 가버나움 베드로의 장모집이 예수님의 숙소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올라 오셔서는 월세방이나 전세방 하나 얻으실 여유가 없으셨다. 예수님의 달콤한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해가 지자 아늑한 자기 집으로 각자 흩어져 저녁식사를 하고 가족과 함께 포근한 잠자리에 들어 하루의 피곤을 풀었으리라.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 곳이 없었다. 석양이 되면 차디찬 냉기가 도는 감람산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셔서 하룻밤 지새우시고 이튿날 또 성전에 나오셔서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산숙(山宿)하는 노숙자였다고 생각한다. 천지가 그의 소유이시고 백만장자보다 더 부자이신 지체 높으신 그분이 냉혹하리만큼 차고도 찬 바위 위에 몸을 기대어 하룻밤을 지내셔야 했던 야속한 세상이었다.

출생부터가 어처구니없었다. 우리 문화로 표현하자면 소와 말을 가두어두는 외양간에서 출생하신 그분을 쇠 죽통 혹은 말 밥통에 담아 눕히셨다는 뜻이다. 최후 죽음 역시 우리를 통곡케 한다. 흉악한 죄인만을 골라 죽이는 십자가에서 극형을 당하셨다. 살아있는 몸 생체를 마치 오징어를 벽에 걸어 말리듯이 높다란 나무에 대못을 박아 대롱대롱 걸어 놓고 기진해서 지쳐 죽으라고 내팽개친 저주의 죽음이었다. 오직 우리를 살려내고자 죽으러 오신 십자가의 생애였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사53:5 공동번역). 그러나 십자가 밑에는 전혀 딴판이 벌어졌다. 군인들이 요란스런 도박판을 벌여 예수님의 성의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의 기독교는 예수님의 희생정신은 망각하고 종교 놀음판을 벌이고 있지는 않은가? 거침돌이 디딤돌인 줄을 모르고 장애물이 보일 때마다 불평을 민첩하게 쏟아내는 속 좁은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하늘나라에는 이등 시민이 없는데도 마귀계단으로 거침없이 내려앉아 혈기와 정욕의 쓰레기를 쏟아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른다. 굳이 성을 구별해서 부른다면 남자는 ‘성자’란 뜻이고, 여자는 ‘성녀’란 뜻인데 과연 그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싱싱한 계란에 썩은 계란이 섞여 음식이 만들어졌다면 송두리째 폐기시켜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싱싱한가?

다시 예수님을 흠모하자. 예수님보다 잘 살지 않는가? 귀족풍이 들지 않았는가? 호강만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예수님 면전에서 염치도 없이 푸념만 늘어놓았던 부끄러움을 되풀이할 수 없다. 정말 죄송스러울 뿐이다.

주목!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나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12:2 공동번역).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