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이 그리운 시대

 

淸貧)은 예수님의 가난하심을 본받아 사는 삶을 말한다. 무조건 모든 물질문명을 거부하는 무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아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보다 영혼의 풍요를 이루신 분이셨다.

그러나 가난한 일생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친히 천국을 증거 하길 원하셨다. 진정한 부요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천국적인 삶인지를 몸소 보여 주시면서 오늘날 우리의 삶을 예견하셨다. 시대와 사조를 떠나 불변하는 예수님의 정신은 단연 청빈한 삶이다.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가야 할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되새기며 새로운 각성을 하고자 한다.

한국 교회와 청빈

한국교회는 교인 배가 운동과 연보모금 운동에는 열성이어서 년간 헌금액이 2조원이나 된다. 이 엄청난 돈은 대부분 성전건축이나 자체소비에 써 버린다. “동양 최대의 건물” “단 한 번의 헌금액수가 수 백 만원” 운운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다. 소위 큰 교회, 대형교회라고 일컬어지는 교회들은 물론 대부분의 교회들이 지향하고 있다. 한 교역자가 두 개의 교회를 담임하고 왕복 시무하는 일, 수백 수십 억짜리 맘모스 대 교당을 짓고, 교회 확장의 여력으로 호텔 같은 기도원도 짓고, 수십 대 교회버스로 교인을 실어 나는 데도 있다.

교인수가 가장 많고 건물이 가장 큰 교회가 되려는 허황된 욕망에 마음은 바쁘다. 또 그렇게 해 놓고는 큰일이나 한 듯 우쭐거리는 한국교회는 물량 비대화에 맛들어 교회에선 돈에 지대한 관심을 두는 배금주의 풍조가 심각한 지경이다. 신앙과 복음 전도보다 물질 중심으로 운영되어가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단들이 온통 물량적 비대화에만 경쟁하고 질주하는 실정이다.

소위 큰 교회는 계속확장, 계속전도, 새로 더 큰 교회 건립, 끊임없이 교회 새 단장, 사상 최고의 헌금액수, 세계 최대의 교회, 세계 최다수의 신도 수용하는 단일교회, 버스구입, 지나친 사치나 눈부신 발전 등이 자랑이어서 이런 현상이 곧 교회 부흥인줄만 알고 있다. “온 세상이 겪는 불황속에도 교회만은 전천후의 호경기”라는 것이 사회 언론들이 교회를 비꼬는 말이다.

매머니즘(拜金主義)

한국교회 안에서는 돈이 교회를 지배한다. 연보 많이 내는 이가 교회 높은 직분에 출세가 빠르고, 돈 잘 내는 이가 믿음 좋은 이로 평가를 받는다. 부흥사나 목회 성공자가 되려면 교인들에게 돈을 잘 짜내는 수완이 뛰어나야 한다. 그것에 서툴러서는 가망이 없다.

물론 하나님께 드리는 진실한 봉헌도 많겠으나 무리이다 싶을 만큼 헌금을 강조하는 기도원이나 교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시골의 어느 교회는 18만원이 연간 예산액이다. 그러나 대형 교회의 일 년 헌금은 억을 넘어 조에 이른다. 교회 헌금이 구제나 봉사보다는 교회 치장이나 인건비에 소모되고 그러는 사이 교회 밖의 불쌍한 겨레들의 실존적 고민에는 동참하지 못하고 만다.

오늘의 시대는 이상보다 돈이 우위에 있다. 신성한 종교마저 돈밖에 모르는 매머니즘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시대적 급변화의 안타까움이다. 우리 기독교인들마저 파괴된 가치관을 가지고 현실 속에서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살아간다. 복을 받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 기복주의가 팽배해 있고, 물질이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저주받은 성도라고까지 표현하는 한국교회, 주님이 보시는 관점은 어떠할까.

눈에 보이는 물질만으로 믿음의 성숙을 평가하는 이들에게 저주라는 두려움이 임하는 것은 아닐까. 돈이면 만능이고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줄 확신하고 돈맛에 재미 들린 종교인들은 진정 예수님의 정신을 바로 이어 살지 못하는 이들이다. 전도를 숫자나 건물크기나 돈의 액수 늘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물량 비대화의 미신을 버리고, 하나하나의 그리스도인의 인격변화에 전력을 다하자. 교세 팽창주의와 인원을 늘리는 것이 기독교의 부흥인줄 짐작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수님의 정신, 청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9:58). 33년간의 이 세상 삶을 살으신 예수님의 일생이 어떠했는가. 주님은 탄생부터 가난했다. 쫓기는 신세와 비방 받는 자리, 모욕과 핍박의 시절을 단 한순간도 지나지 않으신 적은 없었다.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의 뒤를 이어 목수 일을 하신 분이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시려 가난하고 낮은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 머리 둘 곳이 없을만한 가난은 거룩한 청빈의 삶이다.

일생 하늘나라를 전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길 호소하신 만큼 그 삶에 위배되는 삶은 결코 살지 않으신 것이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0-21). “그러므로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

이런 예수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자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면 정신을 빼앗긴 사람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 오늘 우리들처럼 모든 소유를 그대로 가지고 따르지 않았다. 집, 재산, 처자, 사업, 지위, 취미, 오락, 명예를 전부 버렸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말이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마19:27).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는 버릴 것이요, 주를 좇기에 방해요소일 뿐이었기에 과감하게 결단한 것이다.

성 프랜시스는(이탈리아, 1181-1226)

그는 청빈양과 결혼했고 자기 아내는 가난이라고 했다. 제자들에게 책 한권도, 수도원 건물도, 방 한 칸도 없게 하면서 완전한 무소유 무일물을 살았다. 아무 소유가 없던 그가 어느 날 제자를 위해 바구니를 짜고 있었다. 바구니를 짜면 책을 담고, 책을 담으면 다른 것도 담고, 다른 것을 담으려면 또 다른 바구니가 필요하고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하는 소유를 발견한 프랜시스는 짜던 바구니를 그대로 불태워 버렸다.

주님을 사랑하는 길에 방해 요소란 아무 것도 없게 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그의 마음인 것이었다. 프랜시스와 그의 제자들은 일생동안, 일체 남의 도움을 거절하면서 스스로 식량을 조달했다. 자신들의 힘으로 조의조식하며 살아갔다. 노동은 기도와 같다는 정신으로 일하면서 청빈한 일생을 살았다. 그들에게 남겨진 소유란 사랑하는 예수님이 전부였다.

마더 테레사(유고슬라비아, 1910-1997)

“우리에게 가난은 필연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가난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명 안에서 온전한 봉헌을 통하여 가난의 자유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면, 순명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우리를 통하여 할 수 있도록 그분에게 순응하는 방법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고통스런 그들의 모습을 지닌 그리스도께 마음을 다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득찬 것에는 채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텅 빈 것에만 채울 수 있습니다. 깊은 빈곤에다 말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예’라는 대답은 텅 비어 있거나 텅 비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가득 찬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주님과는 가까워 질 수 없다. 주님과 나만이 존재하는 마음이 되어야 그분이 온전히 거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소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면 텅 비워둬 주님이 오시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신인의 자세이다.

우리의 자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완전한 가난의 길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많은 행위가 아니고 오히려 행동에 옮기는 사랑이다. 주님의 관심은 크고 넓은 교회당이나 성도의 인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느냐에 주님의 관심이 달려있다. 푯대를 향하여 주님처럼 살려는 애씀을 가장 귀하게 보시는 것이다. 한국교회나 성도들 모두는 물질만능이나 배금주의를 속히 벗어버리고 주님 중심의 목회와 삶을 살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철저한 나눔의 자세가 있어야 하겠다. 자신의 배반 불리자는 이기주의나 이욕주의를 버리고 주님처럼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넓고 깊음을 소유해야 한다.

왜 프랜시스가 거지나 다름없는 초라한 생활을 했을까? 마더 테레사는 왜 가난을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비유했을까? 가난한 마음에 헛된 욕망이나 주님이 싫어하시는 악한 마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주님의 모습을 겸손히 닮아 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일생의 표본이시며 우리의 거룩한 목표가 되어야 할 청빈을 사랑하자. 청빈한 신앙인으로 주님의 마음과 이웃의 마음을 위로 해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