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많이 닮았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이는 우리들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입니다. 이러한 못된 열매들이 성령의 열매로 맺히기 위해서는 고난과 역경이라는 환경 속에서 우리의 언행심사를 예수님의 보혈로 날마다 씻고 닦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성품은 연단받는 환경 없이는 영적으로 성장하기도, 좋은 열매를 맺기도 어렵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을 때 아들의 형상인 예수그리스도 형상을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몇 달간 시간제 일을 하면서 경영자와 관계가 불편했던 적이 있습니다. 큰 문제도 아니었는데 함께 한 친구에게 일을 배우고 메시지를 전달 받는 과정에서 실수가 생겨 오해와 불신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점차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급기야는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었고 이러한 상황을 만든 누군가에게 그 원인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무겁고 짧지 않은 시간을 어둡게 보내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때 묵상한 이사야 53:1-12의 말씀이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가장 아름답고 크신 분이 가장 추하고 왜소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마치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처럼 그렇게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하며 죽음의 길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 길을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음의 길을 자원하셨고 희생의 대가로 거둔 거룩한 열매와 성과에 대해 만족하셨습니다.

죄가 없으시고 거룩하신 분이 죄인으로 여김 받아도 잠잠하셨는데 하물며 죄인인 나야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이르자 지금 제가 겪는 과정을 통해 주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제 심중에는 비난의 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마치 재판관이나 된 듯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불편한 마음을 꾹꾹 누르고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 그것이 잘 인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느냐? 네 마음에 사랑과 용서는 어디에 있느냐?’ 저는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미움과 억울함, 서운함으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상대방의 잘못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잘못을 보고 잘못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임을 보게 해달라고. 더 나아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주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으면서 용서와 사랑을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주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일어났습니다.

비난의 소리를 견디며 잠잠히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같은 시간대 일하던 동료가 그만두게 되자 경영자와 자연스레 오해가 풀리면서 화평이 이루어졌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겸손과 인내의 본을 보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많이 닮은 분은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일하지 않으며, 가장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애쓰지 않고, 남들이 자기를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주님 한 분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 토머스 무어는 겸손, 그것은 낮은 곳에서 천국의 모든 미덕들을 싹 틔우는 감미로운 뿌리라고 노래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겸손히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을 오르셨던 어린양 예수님의 겸손을 잠잠히 묵상해봅니다.

박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