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 그곳은

내가 매일 하는 일 중 으뜸가는 일은 주님과 교제하는 일이다. 나의 주된 관심사는 내가 얼마나 많이 주님께 봉사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나의 영혼이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영양공급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다. 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북돋아줄 수 있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도 있고, 또한 나 자신의 다른 면으로 주님의 자녀로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주안에서 기뻐하지 않고, 나날이 나의 영혼이 영적인 영양 공급과 힘을 얻지 못한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이 사역을 그릇된 정신으로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해야 했던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나의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때로는 경고와 채찍질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제일 먼저 기도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신집중이 안 될 때는 흔히 15분에서 1시간 정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곤 했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이런 문제는 없다. 나는 나의 아버지이자 친구이신(내가 그럴 자격은 없지만) 주님께 귀중한 말씀을 통해 나에게 보여주신 것들에 대해서 말씀드린다.

나는 가끔씩 신앙생활의 초창기에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에 대해 놀라곤 했다. 나의 육신이 먹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내 영혼 또한 그렇다. 물이 수도관을 통과하듯이 우리 마음속을 통과만 하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읽는 성경 구절을 묵상하고 또한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 넣어 삶으로 살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죠지 뮬러의 일기중에서.

신발을 벗자

우선순위를 잘하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낳게 된다. 가장 먼저 하는 일, 가장 우선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 그것을 꾸준히 이루어 가는 사람은 결국 승리자가 된다. 죠지 뮬러는 봉사도 전도도 말씀 전하는 것도, 그 무엇도 하나님을 만나는 일보다 우선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일생 60만 명의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던 고아의 아버지. 그보다 바쁜 사람이 어디 있었을까. 그럼에도 그를 지탱한 힘은 하늘 아버지였던 것이다. 주님과 대화하면서 일을 진행하고 의논하면서 때론 위로도 받고, 어느 땐 채찍질도 당했다고 고백한다. 가장 안심되는 분과 모든 일을 상의하면서 꼭 필요한 위로와 격려, 충고와 채찍질을 받았으니,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없이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너무 분주해서 주님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던 마르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하나만 하거라. 가장 좋은 것을 택하여라.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면서 어떻게 나와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니.

오롯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은 내 삶터에 분명히 있다. 주님은 우리 환경을 통해 이미 답을 주셨고,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이 떨기나무에 불의 형상으로 나타나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 명령하는 대목이 나온다. 모세가 신발을 벗었을 때, 이제까지 자기 방법으로 살아왔던 삶을 끝낸다는 의미가 있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 그곳이 어디든 그 자리가 주님과 만나는 자리인 것을 깨닫도록 하자. 거긴 거룩하게 변화할 것이다. 그 자리, 내가 선 그곳을 거룩한 곳으로 만들 사명이 있음을 잊지 않으면서 다시, 신발을 벗자.

허리를 굽히자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과 함께 한 나환자들을 두고 혼자 피난할 수 없다며 애양원을 지키다 순교하셨다. 마흔여덟 살의 젊은 나이였다. 순교자. 나환자의 아버지. 원수를 사랑한 사람은 목사님 앞에 늘 붙는 수식어들이다. 이 단어들이 거룩한 것은, 목사님이 있었던 자리를 채운 내용물이었기 때문이다. 손양원 목사님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낮고, 그늘지고, 불편한 곳이었던 애양원은 거룩한 삶으로 채워져 향기 나는 곳이 되었다.

누구도 아닌 예수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족도 세상도 뒤로 한 채, 온 생애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쌓아간 사람. 그 높이가 하늘까지 닿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만 하며, 손을 잡아 천국으로 이끄셨던 것이다. 그리고 애양원이라는 장소는 거룩의 향기가 나는 흔적으로 오늘까지 남아 거룩한 귀감이 되고 있다.

성 안토니오가 자기의 가산을 다 나눠 가난한 사람을 주고 굴속에 들어가 은둔생활로 고생할 때 하루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안토니오야, 네가 아무리 경건하게 살고자 하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헌 신을 고치는 노인만 못하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곧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신 고치는 노인을 방문했다. 노인은 성자가 온 것을 알고 반가이 환영했다. 안토니오는 노인에게 묻기를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십니까?” 하였다. 노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생활이 몹시 가난하므로 매일 신 고치는 것으로 생활비를 삼고, 저녁에는 가정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에게 하나님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을 하루 일과로 과정을 삼습니다.” 하였다.

경건한 안토니오에게 헌 신을 고치는 노인보다 못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노인의 장소가 더 허리를 굽혀 치열하게 싸워 이겨야 하는 자리였음을 칭찬하는 것이며, 그 자리에서 겸손하게 나아갔음을 더 값지게 기억하시는 것이리라. 언제든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자리에서 높아진 마음을 갖기보다, 더 허리를 숙이는 자리, 더 무릎을 구부리는 자리가 어디인지 둘러보라. 그리고 내 자리에서 고치고 새롭게 정돈할 것들은 무엇인지 확인해 보자. 내 자리는 거룩한 땅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모셔야 하기 때문이다.

물어보자

베드로의 발을 닦아주시기 위해 허리를 굽히신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며, 흔들리는 마음을 가눌 수 없어 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연상해 본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등을 바라보면서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과 목숨까지 주를 위해 바치겠다고 눈물로 다짐했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던 자리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던 베드로처럼 강렬했다. 허리를 굽혀 눈물로 주님의 발을 닦으며 사랑의 고백을 드렸고 순교를 각오했다. 주를 위해 살고 또, 죽기를 기대했다.

내 자리가 거룩을 향해 가도록 주님이 중심이 되는 시간과 과정을 만드는 일, 그것에 여전히 설레며 충실한지 나에게 물어보자. 아직 설레고 있니? 아직 기대하고 있니? 아직 기쁘니?

주님을 사랑하는 일 말고는 이 세상 그 어떤 일도 소용없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다시 묻고 결단하자. 거룩한 자리. 주님과 나만 아는 비밀스럽고 행복한 자리. 장소가 어디인가보다 그곳에 담긴 거룩함을 주목하면서 집중하면 된다. 어떤 곳이 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엇이 내 마음을 흔들었기에 지금 내가 여기 서 있는가. 나를 흔들던 그 감동과 설렘의 기억이 내 자리에 여전히 존재하도록 되물어 보자. 강한 실천의 충동을 느끼고, 거룩한 도전을 해 보려고 열망하며 아프던 기억들. 흔적들. 거룩한 가능성을 만들어 내고 싶어 안달하던 순간들이 아직은 존재하기에 내가 여기 서 있는 것이다. 내 마음에게 말해주라. 네가 선 그곳은 거룩함을 품던 자리다. 잊지 않았지?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