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와 진실

c1a6b8f1_bef8c0bd45.png같은 교회를 섬기는 권사님 딸이 아이를 낳았다. 권사님은 이제 할머니가 되었고, 손녀가 생겼다. 딸을 도와 손녀를 돌보는 게 권사님의 일과가 되었다. 그때부터 권사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매일 손녀 이야기를 하고 다니신다. 오늘은 목욕을 시키는데 뭐라고 하더라, 업어줬더니 뭐라고 하더라, 혼자 놔두고 일을 하고 있으면 이것저것 종알종알 하더라는 등. 그런데 권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주변 사람들은 권사님이 소설을 쓰신다고들 한다. 아직 몇 개월밖에 안 된 아이가 무슨 의사표시를 그렇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돌도 안 된 어린애가 그렇게 일일이 이야기할 리가 없고, 권사님 혼자의 상상으로 그렇게 생각되는 것을 소설 쓴다고들 하는 것이다.

여러 교인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어디를 다녀오는데 길거리에서 어느 중년남자 둘이 멱살을 잡고 욕을 하며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신호에 걸려 몇 분 정도 자동차가 멎은 상태에서 그 모습들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교인들은 전부 한마디씩 한다. 이래서 싸운다. 저래서 싸운다. 둘이 친구다, 아니다, 죽이겠더라, 예수 믿으면 그러겠냐는 등. 말없이 옆에서 그 대화를 들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상상 속에서 살고 있는가?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앞에 말한 권사님만 아니라 우리 모두 소설을 쓰며 살고 있는 것이다.

소설을 영어로는 픽션(fiction)이라 한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뜻이다. 물론 사실을 바탕으로 쓰는 소설의 분야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픽션을 허구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한다. 허구(虛構)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보면,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듦이라 정의하고 있다. 사실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나, 묘사와는 달리 가공의 인물 혹은 이야기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허구란 작가가 현실에서 유추해 낸 가공의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세계이므로 현실 세계와는 다르며, 현실과 허구는 병립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누군가가 소설은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하여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허구의 세계를 진실성 있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소설이 개연성 있는 허구또는 가공의 진실인데, 현실을 부정하고 허구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기도 하고, 거기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소설은 그렇다 치고 수필에서도 허구가 있다면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수필에도 어느 정도 허구를 허용하여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수필은 절대 허구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수필은 체험문학이요, 사실문학이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반면에 예술적 효과나 감동을 창출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허락해도 된다는 중립론도 있다.

언제인가 어느 목회자가 상담을 해온 적이 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수기로 써서 어느 잡지사에 냈는데, 그것이 당선이 되어 출판이 되고, 그 바람에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고, 일생 목회자로 헌신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고를 받은 출판사에서 많이 팔리게 하려고 많은 부분을 거짓으로 각색했다는 것이다. 일생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려서 괴로웠는데 그때 그것을 상담 중에 고백한 것이다.

어느 간증자는 자꾸 간증을 하다보니까, 사람들에게 은혜를 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자꾸만 무엇인가를 더 보태게 되더라고 하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소설가가 아니다. 그런데 매일 삶의 구석구석에서 소설을 쓰고, 나름의 이야기들을 쓰면서 허구와 상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이 진실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을 것인가 생각하지 않는다. 허구와 상상 속에서 살면서 그것의 진실을 논하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기준이 얼마나 진실과 먼 거리에 있는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기가 기준이 되어 모든 것의 정답을 다 아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사람 보기에도 잘못된 것이 보일 때가 많아 웃고 넘길 때가 많은데, 하나님은 얼마나 어이없어 웃고 계실까? 그런가하면 허구가 진실인 것처럼 자리를 잡을 때도 많이 있다. 그런데도 이런 허구가 진짜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같은 경우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행적이 모두 허구임을 알지만, 세뇌가 되어서 그런지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참 신이신데, 그들을 신격화하고 있다. 허구가 진실을 몰아내고 진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이 진실인 것처럼 자리를 잡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의 허구와 상상이 진실과 진짜를 몰아내고 진짜인 척, 진실인 척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생각을 순간순간 점검해야겠다. 상상을 멈추어야만 하겠다. 더 이상의 허구를 우리의 삶 속에서 용납해서는 안 되겠다. 우리의 기도 속에 허구와 상상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말씀에 허구와 상상을 덧칠하지 말자. 오늘날 우리 사회의 허구와 과장은 극에 이르렀다. 모든 것에 허구와 과장이 넘친다. 과대포장은 선물꾸러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을 과대포장하고, 숫자를 과대포장하고, 인격도 과대포장하고 산다. 종교도 과대포장하고 있다. 신앙과 삶의 허구와 과대포장에서 벗어나자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진실되게 하소서. 언어행실에 허구가 없게 하소서. 상상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게 하소서. 정답을 다 아는 것처럼 살지 말게 하소서. 겸손하게 하여 주소서.”

이안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