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꿈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경건의 모양과, 그 안에 담겨진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과 능력의 일치는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에게 주신 말씀, 가난하고 비참하며 눈멀고 헐벗은 게 바로 너, 라고 말씀하신대도 경건의 능력보다는 모양에 치중하며 그럭저럭 살고 만다. 모든 것을 버려야 얻을 수 있는 생명인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떠나는 것, 버리는 것, 소유하지 않는 것 등을, 우리는 자유라고 부른다. 장소를 떠나고, 사람을 떠나는 일, 혹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어느 순간을 자유라고 이름을 붙여 주기도 한다. 그런데 결국 깨닫는 건 하나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최종의 완전한 자유는 바로 죄에서 떠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끝없는 선택과 주어짐.

 


떠나게 하신 이유

구약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가끔 되새겨보면, 위대한 그의 걸음에 살며시 질투가 느껴질 때가 많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처음 명한 것은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쌓아온 경험, 믿었던 사람, 지식, 오래 하던 일, 누리던 안락한 환경, 그리고 아버지와 혈육을 떠나가라고 하신다. 창세기 124절에 이에 아브람이 야훼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라고 나온다. 75세에 그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말씀을 따라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떠난다.

 


그때까지 자녀가 없던 그는 하나님이 내가 네게 보여준 땅으로 가면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꿈 하나를 붙잡게 된다. 자식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할까 의심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니 따라간 것이다. 하란을 떠나 드디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라고 했다. ‘세겜은 가나안에서 잘 알려진 유명한 지명인데, 그 상수리나무가 왜 이처럼 유명한 지명처럼 사용되었는가 하면, 그런 곳이 당시에 그 땅에 거하던가나안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하던 장소였기 때문이었단다. 아브라함은 거기서도 하나님을 만나 뵙고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을 재확인 받았는데, 그 즉시 바로 그곳에 단을 쌓았다.”고 했다.

가나안 사람들이 우상 신을 섬기던 장소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로 바꾸어 버린 것이었다. 떠남의 목적이 나의 무언가를 이루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터를 닦으며 나아갔다는 것이다. 내가 밟는 모든 땅에서 주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예배로 나아가니, 혹 그곳이 더러운 우상의 장소였어도 주를 위해 떠나온 나로 인하여 예배의 자리로 바뀌어 지는 것, 주님이 나를 떠나게 하신 이유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

아브라함은 떠나면서 위대한 꿈이 생겼지만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거룩한 터를 닦아 나아가니 꿈은 저절로 이루어졌다. 목표로 주신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만큼 영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아니, 말씀을 주시는 자리가 결과를 얻는 끝의 자리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처음 자리가 된다 해도 예, 하고 나아갈 거룩한 심령으로 바뀌어 버렸다. 말씀으로 순종한 묵묵한 자리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거룩한 터를 닦으며 나아가니 그는 이미 믿음의 사람이요 완전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작과 끝이 공존해도 그것은 이미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성 프랜시스가 덕의 진보를 이루며 성장함에 따라 늙은 악마와의 불화가 더욱 잦아졌다. 그에게 더 큰 은총의 선물이 내려지면 유혹은 더욱 교묘했고, 그에게 퍼붓는 공격은 더욱 심했다. 물론 이러한 정신적인 유혹도 프랜시스의 영광을 증가시키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 결과로 프랜시스는 뼈를 깎아내는 번민에 빠졌다. 고통에 못 이겨 자기 육신을 학대하고 고문하기도 했다. 기도하였고 쓰라리게 울었다. 그렇게 몇 년을 휘둘리고 나서 어느 날, 뽀르찌웅꼴라의 성 마리아 성당에서 기도를 올리는데 마음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프랜시스야, 너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라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그때 프랜시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여, 어떤 산을 제가 옮기기를 바라십니까?” 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 산은 너의 유혹이다.” 프랜시스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하였다. “주여,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곧 모든 유혹이 물러갔고, 그는 거기에서 풀려나와 마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온전히 고요해졌다고 한다.

언제나 우리의 길은 새로운 시작점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하시는 분은 주님뿐이시다. 나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주의 자비가 필요한 작고 여린 존재일 뿐이다.

 


언제나 시작점이다

슬픈 일이다. 사랑이 동기가 되기보다는 헛된 것이 동기가 되어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세속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능가한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똑바로 보지도 않고, 우리의 정신 상태를 점검해 보지도 않으며, 허영이 우리를 몰아붙여 동하게 될 때 그것을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조그만 선행이라도 하면 주님은 간데없고 내가 높아지기 일쑤다. 선하지 못한 나에게는 무한한 인내력을 발휘하고 누가 나를 선하지 못하게 여기면 단번에 되갚아주거나 화를 낸다. 하나님이 하셨고 나의 자리는 언제나 시작점을 잊지 않아야 꿈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의 찬사 속에서 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만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점이 어디고 결과가 어디인지는 주님만이 아신다. 내 자리에 대해 확신하거나 섣부른 긍정을 발휘하여 그것이 교만과 허영의 덩어리로 전락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히브리서 118절에 믿음으로 아브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어디를 갈지 알지 모르지만은 믿음을 갖고 말씀을 따라갈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임했다.

뒤돌아보니 너무 많이 온 것 같고 혹, 적당히 높이 쌓은 것 같은 결과들이 내 앞에 있다고 여겨진다면 거기가 나의 시작점이다. 거기가 다시 내 꿈을 향해 출발하는 시작점이다. 나를 믿지 말고 주님을 믿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언제고 누군가에게 남김없이 넘겨질 수 있다. 내 친구들은 언제고 나의 믿음을 무너뜨릴 적이 될 수도 있다.

 


프랜시스는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좋은 선물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 은밀히 숨기려 하였다. 그것들 통해 칭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인데,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자기멸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뭇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면 자주 이런 말로 대답하고 하였다. “저를 완전한 사람으로 찬사를 보내지 마십시오. 저는 아직도 아들 딸을 낳을 수 있으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 끝이 아직 확실치 않은 사람은 찬사를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이러한 것들을 나에게 빌려 주신 분이 다시 이것들을 물려가려고 하면 나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육신과 영혼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이렇게 기막힌 선물들을 강도에게 주셨다면, 그는 저보다 더 고마워했을 것입니다.” 이것이다. 다만 하나님께만 영광을 드리는 그 은총이 있다면 거긴 꿈이 시작되고 꿈을 이루어가는 출발점이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