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저는 탈북민들을 돕는 새터민교회인 바울선교교회의 한 탈북청년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께 북한사람들을 탈북시키고 한국에 정착시키는 북한선교에 앞장서는

 


갈렙선교회를 알리기 위해 천국의 국경 2 밀항편을 소개합니다.

 


북한 선교에 관심과 뜻을 가지신 분은 혹은 문의 하실 것이 있으신 분은

 


갈렙선교회의 홈페이지(http://www.calebmission.co.kr/)에 오셔서 확인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그 동안 갈렙선교회 대표로써 북한선교에 앞장서오신 김성은 목사님에 대한

 


간단한 신문기사 몇가지를 올려놓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글을 각 교회에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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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은 목사님 기사

 

탈북자 시신·팔려가는 ‘꽃제비’ 아이들 보며… “목회자로서 침묵할 수 없었다”

 

최근 北 인민보안성 내부 문건 공개한갈렙선교회 김성은 목사

 

“탈북자 시신을 직접 보고 어린 ‘꽃제비’ 아이들이 얼마 안 되는 돈에 팔려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저의 심정을 이해할 겁니다. 목회자로서 그런 모습을 보고 침묵한다면 과연 우리가 얘기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갈렙선교회 김성은 목사는 최근 인터뷰에서 북한 인민보안성(현 인민보안부)의 내부 문건을 국민일보를 통해 처음 공개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2000년 1월 중국 방문 중 두만강에서 꽃제비들의 처참한 모습을 본 뒤 탈북자에 관심을 갖게 됐고, 목회자가 된 후부터 줄곧 탈북 사역의 길을 걷고 있다. 사실 이번 자료는 북한의 꽃제비와 탈북 여성들이 낳아 중국에 남겨둔 아이들을 데려오는 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얻게 됐다. 김 목사는 “북한의 현실이 이렇게 처참한데,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들이 과연 한국에서 편하게 살 수 있겠느냐”며 “그들이 가족과 만날 수 있도록 돕고, 더불어 그 황량한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붙잡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서해상으로 9명의 탈북자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도왔던 것도 김 목사였다. 그는 “고아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신 성경 말씀대로 행할 뿐”이라며 “예수님이 주신 그 비전 때문에 순교도 각오하고 폭풍 속에 배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늘 비용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가 탈북자 30여명과 함께 지내고 있는 천안 바울선교교회는 여전히 작은 지방 교회일 뿐이다. 짬짬이 불러주는 교회나 단체를 찾아다니며 북한 실태에 대한 강연이나 간증을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그래서 지난 3월 탈북 역시 비용 문제로 준비기간이 2년 넘게 걸렸다. 당시에도 암 투병 중인 집사님이 내놓은 헌금이 토대가 되고 이후 여러 사람들의 성의가 모여서 기적처럼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꽃제비들을 데려오겠다는 그의 꿈도 현실화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접한 탈북자들을 미래 북한 사역자로 키워서, 통일된 뒤 북한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싶다”며 “그 꿈을 위해 늘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탈북자들 탈출 돕는 갈렙선교회 김성은 목사 “‘형제를 사랑하라’… 말씀대로 따를 뿐입니다”

 

 

 

“아직도 중국과 제3국에는 수많은 탈북자들이 두려움과 공포,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들에게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게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24일 탈북자 9명의 기획입국을 도운 갈렙선교회 대표 김성은(47) 목사는 25일 전화 인터뷰에서 “데리고 오지 못한 가족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탈북자들의 얼굴이 떠올라 안타깝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목회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이번에 공해상에서 탈북자들을 직접 맞이한 김 목사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리고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다”며 “이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탈북자 입국을 돕다 보면 인신매매범으로 오인되거나 탈북자들이 지레 겁을 먹어 중도에 포기하는 등 아쉬움이 적잖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면 미군들에게 매를 맞는다고 믿고 있다”며 “‘잘못 온 것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향후 몇 명의 탈북자를 더 데려올지는기밀사항이라 밝힐 수 없지만 탈북자 구출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기 때문에 어떤 난관이 있다 해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김 목사가 탈북자들을 돕게 된 것은 개인적 헌신에서 시작됐다. 전북 군산 출신으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그는 출석하던 교회의 목회자를 따라 중국 두만강 유역에 선교하러 갔다가 북한의 처참한 실상을 보게 됐다. 탈북 꽃제비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확신하고 갈렙선교회를 설립,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들의 국내 입국을 돕는 한편 예장 대신 총회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2006년 12월 목사 안수를 받고 바울선교교회를 개척했다. 부인 박 에스더(42) 목사를 만난 것도 2000년 중국에서였다. 인민군 중대장 출신의 탈북자인 부인은 김일성 사망 때 김일성 동상 앞을 지킨 열혈 당원이었다. 김 목사는 그를 조선족으로 위장, 한국에 입국시킨 뒤 자수하게 하고 결혼까지 했다. 박 목사는 천안 나사렛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지난 7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들 부부는 나사렛대 강의실을 빌려 탈북자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다 2007년 지금의 자리(천안시 쌍용1동)로 이사를 왔다. 부부는 한국 물정에 어두운 30여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은행, 병원, 관공서를 숱하게 드나들며 그들의 수족 역할을 했다. 탈북자 선교단체 관계자는 “지금까지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 2만여명 중 30% 정도인 6000여명이 탈북자 선교단체나 NGO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에다 공개되지 않았거나 중국 또는 제3국의 한국 선교사들이 관여한 것까지 포함하면 절반 이상의 국내 탈북자가 한국교회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 목사는 “고통받는 북한 동족의 생명을 구하고 돌보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며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사람과 이야기] 탈북자 돕느라… 목뼈에 철심 박은 목사님

 

바울선교교회 김성은 목사 '꽃제비' 북(北)어린이에 충격 중국서 탈북자 데려오고 가족처럼 국내 정착 도와 아내는 인민군 장교 출신

태국을 거쳐 2008년 초 입국한 북한이탈주민(탈북자) 수민(여·26·가명)씨와 성호(25·가명)씨가 김성은(44) 목사를 찾아온 건 8개월 전이었다. 한국에 와서 연인이 된 수민씨와 성호씨는 탈북자 정착지원 기관인 하나원에서 나온 뒤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생하다가 "천안에 가면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목사가 있다"는 소문만 믿고 무작정 김 목사의 '바울선교교회'에 찾아왔다."절 보고 왔는데 어떻게 거절합니까? 지난달에 결혼식을 올려주려고 했는데…. 교회 형편이 어려워 미뤘습니다만 형편이 풀리는 대로 식을 올려줄 겁니다."바울선교교회는 천안시 쌍용동 주택가 상가 건물에 있다. 100㎡(30평) 남짓하다. 김 목사는 교회 한쪽에 나무 합판을 세워서 6.6㎡(2평) 크기의 골방을 만들어 두 사람이 머물게 했다. 지난달에는 출산 3개월을 앞둔 수민씨를 배려해 자신의 임대아파트를 두 사람에게 내줬다. 이후 김 목사 가족은 교회에서 먹고 잔다.이곳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탈북자 교인은 20여명이다. 교인 말고도 숱한 탈북자들이 도움의 손길을 찾아 이곳에 온다. 김 목사는 그들에게 종교를 묻지 않는다. 교회라기보다 '쉼터'에 가깝다.수민씨는 "나는 대학에 입학해 북에서 배운 간호학을 다시 배우고 있고, 남편도 간판업체에 취직했다"며 "목사님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 14일 충남 천안의 바울선교교회에서 김성은 목사(왼쪽부터 두 번째 안경 쓴 사람)가 탈북자 신자들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김 목사는 전북군산 출신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2000년, 평신도 신분으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 목사를 따라서 두만강 유역에 선교하러 갔다가 북한 인권 문제에 눈떴다."강을 따라 하루에도 수십구씩 굶어 죽은 시신이 떠내려왔어요. 강가에 서 있는데 남자 아이가 다가와 옷깃을 잡고 말을 걸었어요. '같은 동포끼리 같이 삽시다' 라고. 누더기 옷에, 손이 갈라진 논바닥처럼 어찌나 거칠던지…."두만강변의 '꽃제비'들을 잊지 못한 김 목사는 귀국 후 신학교에 다니면서, 중국을 떠도는 북한 주민들을 남한에 데려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헌 옷을 모아 그들에게 나눠주는 일도 했다. 옷가지 수백벌을 넣은 대형 여행가방을 좌우로 목에 건 채 중국 땅을 헤매길 수차례. 옷 가방을 나르다 생긴 목 디스크 수술로 김 목사 목뼈엔 철심 6개가 나란히 박혀 있다.아내 박 에스더(39)씨를 만난 것도 2000년 중국에서였다. 박씨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에스더'라는 이름을 쓴다. 박씨는 "나는 인민군 여자 중대장이자,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밤낮을 안 가리고 한달 동안 김일성 동상 앞을 지킨 열혈 당원이었다"고 했다. 그런 박씨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1999년이었다. 식량 부족으로 300만명 안팎이 아사(餓死)한 '고난의 행군' 때, 과학자였던 박씨의 아버지가 굶어 죽은 것이다.김 목사는 박씨를 조선족 여성으로 위장해 한국에 입국시킨 뒤 자수하게 했다. 그는 박씨와 결혼했고, 2006년 정식으로 목사가 됐다.이후 부부는 천안 나사렛대학교 강의실을 빌려 탈북자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다 2007년 지금 자리로 이사왔다. 지인이 보증금 1000만원을 선뜻 빌려줬다. 건물 주인도 "좋은 일 한다"며 월세를 깎아줬다.김 목사는 수시로 탈북자들을 차에 태워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가서, 탈북자들이 중국에 있는 가족을 불러오기 위해 서류 작성하는 것을 돕는다. 한국 물정에 어두운 탈북자들과 함께 은행, 병원, 관공서도 숱하게 드나든다. 그는 "한 달 교회 운영비(250만~300만원) 중 평균 20%가 기름값"이라고 했다.김 목사 교회의 수입원은 부인 박씨가 북한 관련 강연을 해서 벌어오는 돈과 월 100만원 안팎의 소액 후원금이다. 교회 집기도 사연 없는 물건이 없다. 호떡장수 교인이 25만원짜리 중고 보일러를 기증하고, 선배 목사의 딸이 20년 넘게 쓰던 피아노를 선물하는 식이다.아픔도 있었다. 2002년 8월에 태어난 아들은 뇌성마비를 심하게 앓았다. 작년 1월 27일 저녁, 김 목사 부부는 아이에게 우유를 먹여 놓고 후원자가 될 사람을 만나러 집을 나섰다 밤늦게 귀가했다. 이튿날 새벽, 아이가 불덩이처럼 열이 올랐다. 급히 달려간 대학병원 의사는 "우유를 토한 것이 폐로 들어가서 숨을 못 쉬었다"고 했다.김 목사는 목이 메어 말을 멈췄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나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까지 하면서 탈북자들을 도와야 하나…. 그렇지만 막다른 곳에 부딪혔다고 절망할 때마다 기적처럼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줬지요."지난 15일 오후 6시, 반백의 중년 부부가 김 목사를 찾아와 얇은 봉투를 내밀었다. "우리는 안성에 사는 사람들인데, 이 교회 사연을 들은 독지가로부터 '대신 후원금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찾아왔다"고 했다. 김 목사가 건물 주인으로부터 "사글세를 전세로 돌려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하던 차였다.김 목사는 '작은 정성'이겠거니 하고 감사 인사와 함께 봉투를 받았다. 부부는 이름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총총히 교회를 나섰다. 김 목사가 이들을 배웅하고 봉투를 열자 6000만원짜리 자기앞수표 1장이 들어 있었다. 김 목사가 뛰쳐나갔지만 부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김 목사는 "그분들의 귀한 뜻이 헛되지 않도록 아내와 함께 더 열심히 탈북자들을 돕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