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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컴선교회(www.m2414.org)의 컬럼에서 퍼온 글입니다.

고성준 목사란 분이 쓰신 글입니다.

 

 

글 : 고성준목사  2006-12-03

미국 캔사스 시티에 위치한 IHOP(국제기도의 집)에서 컴 전체 선교사들이 모여 3년 만에 수련회를 가졌다. 3주 동안 계속 된 훈련이었다. 개인적으로는 3번째 IHOP 방문이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특별한 부담을 주셨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대한 기도의 부담이었다.

미국에서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본 한국교회의 상황은 사실 충격이었다. 사람들이 교회를 대하는 태도도 부정적으로 변해있었지만, 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도덕적 타락과 생명 없음, 그리고 말씀에 대한 무지는 한국교회는 코마상태라는 진단을 내리게 했다. 한국교회에 새로운 회복이 필요하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워낙 총체적으로 망가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하나님이 내게 주셨던 비전이 새로운 세대를 일으키는 것과 이들을 통한 세계 선교였다. 그래서 한국교회에 대해서는 그냥 잊고 지냈다. 그게 속이 편했다. ‘나는 그냥 나에게 주신 몫만 열심히 하자. 그러다보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생각했다. 보면서도 못 본 척, 들으면서도 못 들은 척 하고 지난 6년을 지냈다.

1. 이야기의 시작
그런데 이번에 미국 아이홉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끊임없이 한국교회에 대한 부담을 주셨다. 사실 이것은 이번에 처음이 아니었다. 올 초부터 한국교회를 향한 기도가 필요 하다는 부담을 주셨고, 이것은 단순한 부담을 넘어 초자연적인 사인까지 보여주셨다. 당시 우리와는 아무 인연도 없고, 안면도 없던 아이홉의 국제 디렉터(다니엘 림)가 기도 가운데 한국에 대한 기도의 부담을 가지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이상한(?)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방문하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리둥절한 방문이었다. 어찌되었던 3일 동안 집회를 가졌고,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와 회개의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이 분이 기도 가운데 보게 된 한국에 대한 환상은 북쪽에서 거대한 군대가 마치 요엘서의 메뚜기 같이 내려와 남한을 덮는 것이었다. 한국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그리고는 몇 개월이 지났다.

이번에 아이홉에 기도하러 갔을 때, 하나님이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셨다. 다른 선교사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춤을 춘다, 불 받았다 그러면서 은혜 받고 있을 때 나는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 “하나님, 이거 왜 저에게 이러십니까? 제게 주셨던 비전, 저희 교회에게 주신 비전은 사도적인 비전 아닙니까? 교회를 개척하고, 새로운 세대를 일으켜 열방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저희에게 주신 비전 아닙니까? 선지자적 사명(중보기도의 사명)은 저희 교회의 사명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거 제 사명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티며 우기고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 죽고 망해 버리면 누구를 통해 무슨 선교를 한다는 것이냐?” 실제로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유럽의 대부흥과 그로 인한 선교 운동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부흥의 세대가 다 죽어버림으로 소멸되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 - 새로운 세대의 마지막 역사를 보기 원한다면, 한국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 회개의 제목들
그렇다면 한국교회를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첫 째 무엇보다도 회개의 기도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에스겔서는 멸망 직전에 있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심판전야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정도 상태에 이르면 하나님이 더 이상 심판을 보류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각한 것은 에스겔 시대의 영적 상태와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적 상태가 너무나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에스겔 시대의 상황 앞에서 하나님이 심판을 보류하실 수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상황도 심판의 문턱이라는 것 아닌가? 지금은 심각한 위기의 시대이다. 어느 때보다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에스겔서 7장26절은 심판전야의 세 가지 모습을 기술한다.

[겔7:26]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심판전야에는 첫째 선지자에게 묵시가 없고, 제사장에게는 율법 즉 말씀이 없고, 장로들에게는 모략(지혜)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지자는 오늘날의 목회자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분의 계획과 방향을 가르쳐 주는 것이 목회자의 임무이기 때문이다(선지자적 은사가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을 고려한 것임). 제사장은 사람들과 하나님을 연결해 주는 직분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제사장은 루터가 만민제사장주의에서 주장했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하나님을 연결해주는, 세상을 섬기는 제사장이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직분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들은 오늘날의 세상 지도자들에게 해당되는 직분이다. 그런데 심판전야에는 선지자에게 묵시가 없고, 제사장에게 말씀이 없고, 장로에게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1) 선지자에게서 묵시가 떠남
선지자에게 묵시가 없다면, 오늘날 목회자들은 어떤가? 사실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마음 아프고 또 어렵다. 왜냐하면 아직도 정말 신실한 마음으로 목회하시는 훌륭하신 목회자들이 많기 때문에, 이분들까지 함께 덤터기로 넘어가는 것 같아서 그렇다.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할 때,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정말 하나님의 묵시가 남아 있는가?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에 대한 눈이 있는가? 과연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런 거룩함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 교인 수 늘리고 교회를 크게 키우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가? 선지자의 목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과연 오늘날도 선포되고 있는가? 솔직히 자신이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많은 신실한 목회자들이 오늘도 눈물로 사역하고 있는 것, 잘 안다. 그러나 대세를 보았을 때, 자신이 없다.

에스겔서 13장에서 이야기하듯이 돈 몇 푼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팔며,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만을 선포하기에 급급한 선지자는 아닌지... 하나님께서 에스겔 시대의 선지자들을 향해 13장에서 이렇게 질책하셨다.

13: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13: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 있을진저
13:4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
13: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13: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13:19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참 많이 떨고 회개했다. 정확히 오늘날 목회자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저 마음에서 나는 대로 이야기하는 선지자. 성이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않고, 백성들을 위해 성벽을 수축하지도 않는 선지자. 그저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고, 그저 자기 밥그릇에만 집착하는 선지자. 그 일을 위해 영혼들을 팔고 속이는, 그 귀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심판을 목전에 두고도 평강만을 외쳤던 선지자.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여기서 얼마나 다를까?

(2) 제사장에게 말씀이 없다
목회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사장에게 말씀은 있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손에든 성경은 있지만, 과연 삶 속에 말씀은 있는가? 말씀 한 구절을 붙잡고 그것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기도하고 눈물 흘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세상은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해 어떤 하나님을 읽을까? “아, 당신의 삶을 보니,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군요. 하나님은 이익보다 정직을 원하시는 분이시군요. 하나님은 비록 입으로 한 약속이지만 어지기 않으시는 분이군요. 하나님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사랑과 희생을 기뻐하시는 분이시군요” 세상이 우리를 통해 이런 하나님을 읽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편지라고 했는데,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캐리어라고 했는데, 과연 세상이 우리를 통해 읽는 성경은 어떤 성경일까? 정직보다 돈 몇 푼이 중요하다는 성경을 읽지는 않을까? 도장만 찍지 않았으면 얼마든지 말을 바꾸어도 된다는 그런 말씀을 읽지는 않을까? 성? 그저 즐기는 것이라는 음란함을 읽지는 않을까? 어떻게 벌든지 헌금만 많이 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그런 말씀을 읽고 있지는 않을까? 말씀이 사라졌다. 손에 든 성경은 있을지 몰라도, 우리 삶 속에 말씀이 사라졌다.

우리의 도덕적 타락이 이것을 증거 해 주고 있다. 에스겔서 8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4가지로 보여주시는데 첫 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라져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이며, 둘째는 도덕적 타락이며, 셋째는 물질주의이며, 마지막 넷째는 종교의 영 - 생명이 사라져버린 껍데기뿐인 종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또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며 회개제목이기도 하다.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성전을 본다(8장). 성전 한 은밀한 방에 가보니 장로들이 손에 향로를 들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주변에는 온갖 우상들과 가증한 짐승과 추악한 곤충들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뜻인가? 종교의 모습은 있다. 교회도 나오고 기도도 하고 다한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온갖 우상과 추잡한 곤충과 짐승들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를 나오는 신앙의 모습은 있고,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그 곳을 떠나서는 어떤가?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기도를 하고 말씀을 읽으면서도 은밀한 곳에서는 온갖 추잡한 것들 - 음란과 불륜과 거짓과 술수와 뇌물과 검은 거래가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것이 한국 크리스천의 현실 아닌가?

물질주의라는 우상도 심각하다. 돈 몇 푼 앞에서 통곡하며 애통하면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 아닌가? 과연 우리가 섬기는 것은 하나님인가, 아니면 돈님인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이 생명력은 없어지고 종교의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제사장에게는 말씀이 없고.... 생명이 꺼져 버린 기독교. 심판 전야의 모습이다.

(3) 장로들에게는 지혜가 없다
마지막으로 장로들 - 국가 지도자들에게는 지혜 - 참 된 지혜인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볼 때 누구나 동의하는 대목이다. 지혜가 없다. 우리는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주시도록 말이다.

한국은 목회자도, 성도들도, 그리고 국가 지도자도 심판전야에 있었던 에스겔 시대 이스라엘과 똑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세 가지 질병 - 도덕적 타락과 물질주의와 껍데기뿐인 종교는 에스겔서 8장의 이스라엘과 무엇이 다른가? 에스겔 시대의 상황 앞에서 하나님이 심판을 보류하실 수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상황도 심판의 문턱이라는 것 아닌가? 지금은 심각한 위기의 시대이다. 어느 때보다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3. 주님, 한국교회와의 로맨스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이렇게 아이홉에서 한국교회를 놓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동안 북한의 핵문제가 뉴스에 터지게 되었다. 북한의 핵문제는 단순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이것을 정치적인 이슈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모든 정치적 이슈의 이면에는 영적인 이유들이 있다. 북한의 핵문제는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믿는다. 회개하지 않으면 다 망한다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지지라는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선교사들과 함께 북한 핵문제를 놓고 한국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우리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였다. 한국 교회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기도였다. “다 진멸하시겠습니까? 주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는 에스겔의 강청이 우리의 기도가 되었다. 잠깐 하려던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1시간을 훌쩍 넘어 깊은 밤이 되서야 끝났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한 선교사님의 기도가 내 마음을 때렸다. 한 선교사님이 울면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한국교회와의 로맨스가 있지 않으십니까? 그 로맨스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다 진멸하시겠습니까? 그 로맨스를 기억해 주십시오!

(1) 이 기도에는 비밀이 있다
이 기도가 드려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에 큰 슬픔과 감동이 교차하며 “이건 보통 기도가 아니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기도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기도에 주님의 마음이 녹아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주님의 마음이 돌아섰다. 그리고 기도회가 끝났을 때, 거기 모인 50명 모두는 하나님께서 진노를 멈추시고 한국교회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이 기도의 비밀 - 한국교회와의 로맨스를 잊지 말아달라는 기도가 왜 그렇게 특별하며, 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실 수밖에 없었을까?

(2) 이스라엘 기도실
아이홉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기도를 많이 한다. 좀 과도하게 한다. 내게는 이게 못 마땅했다. 다른 나라들은 별로 기도 안 해주면서 왜 이스라엘만 그렇게 기도하나? 이스라엘이 뭐 그렇게 특별한가? 이런 마음이 내 안에 있었다. 그런데 아이홉에 도착한 다음날 기도실에서 우연히 만난 한 미국분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는데, 이번에 이스라엘의 비밀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라고 예언 해주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라는 의심 속에 3주를 보냈다.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에스겔서와 씨름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훈련 마지막 날 이스라엘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한 말 같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잊을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추억들, 로맨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홉 기도실에는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방이 따로 있다. 그렇게 여러 번 기도실을 드나들면서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곳이었다. 관심도 가져보지 않았던 곳이다. 마지막 날 아이홉을 떠나기 전 날 새벽.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 방 문 앞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염없이 느껴졌다. 내가 이곳에서 너를 기다렸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갔다. 울면서 들어갔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놀랍게도 일종이 수다였다. 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늘어놓으시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이것은 아주 아주 이상한 경험이었다. 하나님이 내 마음 속에 빠른 속도로, 엄청나게 많은 말씀을 쏟아 놓으셨다. “내가 아브라함을 처음 부를 때 어땠는지 아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 충격이란... 넌 모를거다.”“다윗이 이 동산에서 시편을 지어 부를 때 그것이 내 귀에는 정말 아름답게 들렸단다.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지!” “모세가 비록 혈기 왕성했지만, 내 백성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했을 때 그 감동이란!” “엘리야가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그리고 베드로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주님께서 그 땅에서, 그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졌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수많은 로맨스를 쏟아 놓으셨다. 너무나 하고 싶던 이야기를, 마치 10년 만에 처음 사람을 만나 쏟아 놓으시듯이 그렇게 쏟아 놓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로맨스를 하나도, 단 하나도 잊지 않고 계셨다.

그 방에 있던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곳에 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한 민족과 맺었던 언약을, 그 추억과 로맨스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하나님. 그 사랑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걸었던 그 순간들, 하나님과 함께 걸어왔던 지난 6년간의 목회, 20년간의 신앙생활. 그 모든 추억들을 하나님은 하나도 잊지 않고 계셨다! 비록 나는 잊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내가 잊어버린 헌신까지도, 그 작은 사랑의 고백 하나까지도, 하나씩 둘 씩 당신의 가슴 속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계셨다! 그 분이 하나님이셨다!

(3) 하나님은 로맨스를 잊지 못하신다.
이 경험을 통해 앞서 이야기했던 기도 - 로맨스를 잊지 말아 달라는 기도의 비밀을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성경을 보니 이것은 아주 특별한 기도였다. 이스라엘의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드렸던 기도였다. 이것은 왕상18장36절에서 엘리야가 400명의 바알선지자 앞에서 민족의 운명을 놓고 겨눌 때 드렸던 기도이기도 했다.

[왕상18:36]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도우소서. 여러분은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더 정확한 곳을 찾아보자. 모세다.

[출32: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출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이 백성을 다 진멸하시겠다고 진노하셨다. 이 위기의 순간에 모세가 드렸던 기도가 출32장의 기도다.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들과 맺었던 하나님의 추억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과 이 땅에서 맺었던 로맨스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그 로맨스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하나님, 이 땅에서의 추억이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의 추억이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과의 로맨스가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그의 독자 이삭을 바칠 때.. 주님, 당신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울렸던 그 로맨스... 이 땅에서 있지 않았습니까?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당신과 씨름하며 그 땅에 하나님 백성을 기초를 놓았던 그 추억, 그 로맨스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기억해 주십시오. 잊지 말아 주십시오.” 엘리야의 기도도 마찬가지였다. “모세와 함께 광야를 걸었던 추억들, 다윗이 당신을 노래했던 그 언덕, 골리앗 앞에 믿음으로 달려 나가던 잊을 수 없던 장면. 주님 기억하시지요?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 땅에서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주님 잊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은 비록 이 백성이 타락하여 음란하게 바알을 섬기고 있지만, 주님, 그래도 이 땅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이삭과 함께 했던 추억들이 있는 땅 아닙니까? 그 로맨스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이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로맨스를 remind하는 기도였다.

(4) 이것이 선지자적인 기도이다.
이 기도에 하나님이 움직이셨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셨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사람, 그 분의 사랑은 일상적인 사랑을 넘어 열병에 걸린 로맨티스트라는 것을 깊이 아는 사람만이 드릴 수 있었던 일종의 “협박기도”였다. 이 기도 앞에서 하나님은 결코 No라고 말하실 수 없는, 가장 확실한 비장의 카드였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의 기도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꿰뚫는 기도, 그 분의 사랑과 은혜 앞에 호소할 수 있는 기도. 그 분의 눈과 마음에 깊은 눈물 자국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도. 이것이 선지자적인 기도이다.  

(5) 한국교회와의 로맨스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요?” 한국에 돌아와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계속 claim했다. “주님, 한국교회와의 로맨스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 추억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한국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한국교회와의 잊을 수 없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님 마음속에 새겨진 로맨스가 있지 않습니까?” 몇 날 몇 일을 주님 앞에 나아가 탄원하며 기도했다.  

“주님, 주님의 교회 위해 소도 팔고, 논도 팔고 맨손으로 밭 갈며 섬기던 1907년 성도들의 추억이 있지 않습니까? 맨발로 겨울거리 걸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하나님을 외치던 그 선배들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녹였던, 하나님의 눈을 적셨던 그 로맨스. 주님, 이 땅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졌습니까? 다 진멸하시겠습니까? 심판을 거두어 주십시오.”  

내가 아브라함을 기억해서, 내가 다윗을 봐서 멸하지 않으시겠다던 주님의 말씀 - 한 사람, 그 한 사람만 있으면 되는데... 다윗 그 한 사람만 있으면....

“주님, 손양원 목사님과의 로맨스를 기억해 주십시오. 문둥병자를 돌보던 그 손길을 주님... 아들 죽인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넘어 양자로 삼았을 때, 주님 이 땅에서 그런 사랑 처음보지 않으셨습니까? 기억해 주십시오. 주기철 목사님과의 로맨스를 기억해 주십시오. 감옥으로 잡혀가는 아들을 향해 순교하지 않으면 내 아들 아니라고 외쳤던 주기철 목사님의 아버지를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 이 땅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졌습니까? 다 진멸하시겠습니까? 이들의 피는 다 헛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양화진에 뿌려진 수많은 선교사들의 피는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다 간 그 분들의 스토리를 기억하시지요?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땅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식도 땅에 묻고, 아내도 땅에 묻고, 결국은 자신의 생명까지 이 땅에 뿌려야 했던 선교사들의 추억. 주님 잊지 말아주십시오. 하나님, 당신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보석 아닙니까? 주님 대천덕 신부님의 기도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아침마다 새벽을 깨웠던 길선주 목사님의 무릎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 땅의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다 진멸하시겠습니까?

주님, 그 무엇보다도 이 땅위에 뿌려진 예수님의 피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땅의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십자가 지시기 전에 이 땅을 놓고 이야기했던 예수님과 하나님의 대화 있지 않습니까? 이 피로 한국 땅에 교회가 설 것이다! 하나님 흥분되지 않으셨습니까? 그 흥분, 그 로맨스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6) 이것이 축복이다
이 땅에 이렇게 많은 claim할 로맨스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지 않은가? 이 땅에 claim할 단 하나의 근거라도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다윗 한 사람 때문에 열조를 멸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 소돔과 고모라에도 10명의 의인만 있으면 심판을 거두 시겠다던 주님 아니신가?

그러나 만약에 그 땅에서 이루어진 아무런 로맨스도 없고, 그것을 claim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remind하고 돌이킬 선지자도 없다면, 그것은 그 땅의 저주가 될 것이다.  

이것이 선지자의 기도이다. 선지자가 없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선지자가 없다면 추억과 로맨스는 영원한 기억 너머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은혜와 자비를 호소하는 기도이지, 공의에 호소하는 기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7) 후손들은? 나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claim하며 그 이름을 잊지말아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까?
주님은 한국 교회와의 로맨스를 잊으실 수 없으셨다. 이 기도는 work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우리의 후손들은 누구를 claim하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 할까? 우리가 우리 선조들을 claim하며 기도했다면, 우리 후손들은 누구를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야 할까?

과연 오늘날은 누가 하나님과 이런 로맨스를 만들어 가고 있는가? 우리 후손들이 claim할 수 있는 그 로맨스를... “주님, 주님 앞에서 그 인생을 드렸던 김 아무개와의 로맨스를 기억해 주십시오. 박 아무개가 그 인생을 드리던 순간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 미래의 로맨스를 만들 오늘의 연인은 누구인가?

“주님, 저는요? 제 삶은 어떻습니까? 과연 사람들이 제 삶을 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 claim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삶을 사는 것이 후손들을 위한, 이 땅을 위한 진정한 축복이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 축복이 되듯이 말이다.

(8) 이것이 선교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 선교의 본질이기도 하다. 선교는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땅을 축복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과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양화진의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축복하실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로맨스였듯이 말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뿐 아니라 순교자의 충만한 수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땅에서 뿌려진 순교자의 피, 그 잊을 수 없는 로맨스를 결코 간과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 선교사와 그 땅에서 이루었던 소중한 이야기. 하나님이 그 땅을 축복하실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삶, 주님의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이 땅위에서의 추억을 만들어갈 사람은 없는가? 오늘도 주님은 이런 사람들의 사랑을, 그 로맨스를 기억하신다. 그리고 먼 훗날, 아니 영원까지 이곳에서 만들었던 우리와의 그 로맨스를 기억하시고 이 땅을 축복하실 것이다.  

2006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