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물

 

최근 흉악한 성폭행과 묻지마 범죄가 잇달아 발생하여 우리를 당혹스럽게, 분노에 치를 떨게 하고 있다. 그 해법은 무엇인가?

병든 사람들

사람들은 성폭행범을 거세하라, 사형에 처해야 한다, 분노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현실이다. 얼마나 치가 떨리는 분노를 느끼기에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 하지만 이런 처방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다. 범죄자가 처음부터 마귀 같은 종자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도 순진무구한 아이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범행을 저지르는 괴물로 변한 것이다.

상습적 성폭행, 묻지마 방화, 살인 등의 범죄자들은 타인과 공감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채 고립되어 살아온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과 연락을 끊고 직업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나주 초등생 성폭행범 고종석(23)과 서울 중곡동 주부 살해범 서진환(42)은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떠도는 ‘외톨이’였다.

오늘날 한국에 15세 이상 60세 미만 연령대에 무직에 외톨이로 사는 사람들이 무려 8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나홀로 무직자가 증가하는 이유로 가정의 붕괴와 취업난을 꼽았다. 가족이라는 안식처가 없는 이들은 심리적으로 고립되고, 또 이혼 등 가정 붕괴를 겪으면서 여기에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지면, 세상을 비관하여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경찰대 이웅혁 교수는 “사회적 연결고리가 약한 이들은 사회에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자신을 이렇게 고립시켜 불행하게 만든 사회에 대한 불만을 범죄로 해소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인간은 남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 배려하는 마음이 꼭 필요하다. 이것은 따뜻한 엄마 품과 주변의 친절과 배려 등 친화적 환경과 의사소통과 사랑을 주고받는 경험에 의해 계발된다. 대부분의 반사회적 흉악범들은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한 것이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배신이나 왕따를 당하는 등 따뜻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깊은 상처를 입었을 경우, 대개 정서불안과 자존감 결여, 주변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 등이 형성되기 쉽다.

반사회적 범죄자들의 절대 다수는 겉으론 멀쩡해도 심각한 마음의 중증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돌아가 안길 엄마 품이, 주변의 따뜻한 보살핌이나 자상한 상담을 받을 기회라도 있었더라면 그런 범죄자가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흉폭한 범죄, 반사회적 범죄자가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가정, 학교, 사회 그리고 교회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 책임 아니라고 눈감을 때, 또 다른 아이들이 절망과 불안 속에서 괴물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해법은 관심과 사랑뿐이다.

치러내는 사랑

얼마 전 ○○일보에서 박지웅 목사님의 ‘가시고기’ 소설에 대한 칼럼을 보았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어린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한 아버지의 희생적 사랑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의 안구를 팔아 아들이 골수이식 수술을 받도록 한다.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아들이 고아가 되지 않게 하려고 이혼해서 가정을 떠났던 아내의 품으로 자식을 보내고, 자신은 ‘가시고기’처럼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가시고기’는 지구상 어류 중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새끼를 키우는 유일한 어종이다. 특이한 것은 암컷이 산란을 하고 떠난 자리를 수컷이 지키며 알이 부화할 때까지 모든 희생을 다 쏟는 것이다. 수컷의 헌신은 참으로 눈물겹다. 천여 개나 되는 알을 하루에 한 번씩 뒤집어주며, 알이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점액질을 분비하고,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초로 위장막을 치고 온 몸으로 막아낸다. 이렇게 24시간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돌보다가 지쳐서 주둥이가 헐고 지느러미가 찢겨 서서히 죽게 된다. 오로지 새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마지막 남은 자신의 육체도 새끼들의 먹이로 내어놓는 것이 가시고기다.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를 동사로 풀이하면 ‘치러내다’ ‘감당하다’라는 뜻이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상대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발버둥을 감당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고도 그냥 잡혀주는 것이다. 그가 철이 없으니, 아직 혼자 일어설 마음이 없으니, 자신의 환경을 극복할 능력이 없으니, 그냥 바보처럼 잡혀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바보처럼 당하기만 하셨다. 죄인들의 악한 본성과 아우성치는 소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괴성과 발버둥을 말없이 감당하고 치러내셨다. 죄성과 정욕 때문에 자신들의 메시아를 죽이고, 범죄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주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면서 사랑의 몸짓으로 치러내신 것이 십자가의 고난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

사랑하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 사랑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얼굴과 눈빛에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나는 과연 가정과 교회, 공동체와 사회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치러내고 있는가? 예수님처럼, 가시고기처럼 사랑을 치러내고 있는가? 자신이 없다면 그 부족함, 흠과 점과 티가 너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하자, 무려 다섯 남자의 품을 전전했고 또 이웃과도 어울리지 못하던 외톨이 그녀가 주저 없이 그물을 달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가성 여인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물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주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은 무엇이었을까?

주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생명수를 주시지만 그보다 먼저 사랑의 샘물을 주신 것이다. 다섯 남자와 동거했지만 채우지 못했던 것, 그녀에게 꼭 필요한 것이 사랑이었으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목말라 하는가! 우리는 매일 주님께 나아가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물을 마셔야 한다. 내가 마셔야만 소외된 사람들, 무직자 외톨이도 껴안을 수가 있다. 그리고 진정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 “주님, 저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물을 주소서!”

이상화